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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비평문

우아름 <미술비평>

때로 뭉뚝한 감정이 가장 예리한 장면을 포착해 낸다. 박희자의 작업이 그렇게 시작한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우울에서 시작한 (2012~2014) 시리즈도 그랬다. 시인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고 했다. 시인 최영미는 서른이므로, 잔치가 끝났다고 종언한다. 시인들은 이렇게 벼린 말로 서른의 당혹을 말했다. 박희자는 사진작가이다. 서른이어서 우울하다는 말은 아직 뭉뚝한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델이 그 감정에 가장 가닿는 순간을 장면으로 벼리어 낸 작가의 감각은 예리했다. 그 장면들의 예리함은 가령, 여자의 눕거나 기댄 자세에 있다. 불안하게 모로 누운 모습에서, 채 편히 눕지 못하고 엎드려 누운 자세에서, 한쪽 엉덩이는 비스듬히 들어 올린 채 두 개의 방문 앞이라는, 방도 거실도 아닌 모호한 공간에 웅크려 있는 모습에서, 장면들은 예리한 감각을 품는다. 박희자 작가의 사진은 만들어낸 장면과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발견해낸 장면의 두 축이 갈마들면서 진행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서른에 들어선 듯한 여성 모델, 그 여자들의 포즈, 그녀들의 방이라는 공간적 요소의 조합으로 인해 이 시기의 작업들은 작가가 연출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인상을 준다. 시선에 감정을 싣는 작가의 방식은 이보다 앞선 작품 시리즈 (2011)에서 발견할 수 있다. 는 이별 이후의 허무함을 사랑의 장소였던 여인숙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아낸 사진 시리즈 작업이다.

이번 작업 시리즈 또한 뭉뚝한 감정과 질문에서 시작해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인 바라보기의 과정을 거쳤다. 작업노트에 작가는 자신의 무력감으로부터 본 작업 시리즈를 시작했다고 썼다. 무력감은 그 시기 작가가 체코의 예술대학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던 데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낯선 사회에서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는 모든 행위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의 생각은 과연 예술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너무 커다란 질문은 그 크기 때문에 뭉뚝한 질문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커다란 질문을 품은 이의 시선 속에서, 사물은 좀 더 의아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생활하고 바라보았던 공간이 예술대학이었기에 그 장소에 놓인 사물의 의미가 예술이란 무엇일지 고민하던 그녀에게 좀 더 생경하게 다가왔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생경하게 놓인 사물들을 카메라에 담기에 이른다. 피사체의 범위는 체코 예술대학의 학생들과 미대 건물 내부 공간 자체에까지 이른다.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이곳이 예술대학인데’ 라는 인식을 거쳐, ‘그렇다면 이것(사물)이 예술인가?’라는 존재론적 발견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이는 타자를 인식하는 수순을 따른다. 일반적인 쓸모의 범위를 벗어나 기형적으로 놓인 사물들은 꽤 확실한 타자가 된다.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신형철의 문장이다. 박희자의 사진 속 사물과 인물은 모두 존재론적으로 확실한 타자이다. 이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작가의 감정과 질문은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끈질기게 타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기어코 확실한 장면들을 포착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캔버스 모서리에 겹쳐 놓인 와인 잔에서 보이는, 위태와 재치 사이에 모호하게 놓인 상태 자체이거나, 하얀 타일 벽에 걸려 있는 선홍빛 수건에서 감각되는 색 표면의 생경함, 다비드상의 성기 아래 받쳐 놓은 유리병에서 포착되는 유머러스함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물을 발견하고 바라보게 만들었던 예술에 대한 뭉뚝한 질문은, 여전히 쉽게 답하지 못할 모호함 속에 대답을 숨겨놓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채로, 모호한 인식론적인 상태에서, 다만 타자를 바라보게 한다. 테리 이글턴은 『미학사상』에서 세계가 육체의 감각중추의 표면에 부딪혀 지각되는 과정이 미적인 것의 자리라고 말한다. 바라보기란 감각중추의 표면으로 세계를 가져와 부딪쳐 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생경한 것들을 향해 부러 내던져본 시선, 그 바라보기의 과정 자체가 예술의 자리를 마련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선에 의해 호명되어 카메라 앞에 선 세계의 부스러기들이 여기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한다.

작가는 사진의 사물성을 끌어내어 전시장에 비치하기 때문에, 낯선 사물을 바라보는 일은 관객에게도 되풀이된다. 사진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전시되지 않는다. 어떤 사진은 인화지 그대로 윗부분만 고정해 끝이 돌돌 말려들어간 채로 놓이고, 어떤 사진은 방문에 장식용으로 붙이는 포스터마냥 거칠게 테이핑되어 있다. 액자 속에 들어간 사진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진의 크기보다 훨씬 여유로운 크기의 유리와 액자틀로 인해 프레임과 사진 사이의 공간이 노출되어 사진이 걸리는 벽면이 드러나거나, 벽돌 몇 장위에 아슬아슬하게 괴어져 있다. 관객 앞에 놓이는 것은 생경한 인상의 사물을 찍은 사진이자, 그 자체로 기이한 사물이 된 평면이다. 미술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 관객이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