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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묻다: 사적공간의 전향

최지나 <미술이론가>

공간에 대한 사유는 캔버스 위 하나의 점에서부터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흰 캔버스는 2차원적 평면이지만, 점 하나가 그려질 때 하나의 공간이 된다. 점의 위치와 크기, 형태에 따라 캔버스 공간은 긴장, 불안감, 주목성, 소외 등등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단순히 점 하나의 효과만이라 할 수는 없다. 캔버스의 규격과 모양, 놓인 위치와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즉 공간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텅 빔’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공간 안의 존재와 그 주위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고찰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특정 공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묻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위는 공간을 분리하고 명명하며 파편화된 공간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집결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칭해진 공간은 다시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고 이 순환은 반복된다.

공간 다루기는 장소성을 질문하는 것과는 다르다. 장소는 기능과 역할에 따라 물리적으로 분절된 영역들이다. 그러나 공간을 논하는 것에 있어 이 공간과 저 공간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인식론적 구분에 가깝다. ‘장소’가 고정된 단위라면, ‘공간’은 사실 운동하는 연속체와 같다. 끊임없이 시간이 개입하고, 여기서 저기로 무한히 나아가며, 또다른 층위로 오가는 파장을 지닌다. 따라서 ‘사적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서의 ‘선 긋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간을 향한 시선에서, 공간을 다루는 마음에서 밖과 안을 드나든다. 이러한 드나듦은 오히려 ‘공적’과 ‘사적’의 경계를 와해한다. 공공 영역을 사적공간으로 차지하기도 하고, 사적 영역을 공공장소로 이동하여 사적공간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는 물리적 폐쇄성을 추구하고 감추기 욕망으로 뻗어가는 ‘사적장소’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적공간은 오히려 ‘열린 공간’이기도 하며,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능동적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 4명의 작가는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사적공간⟫展 은 작가들의 ‘공간 탐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내딛고 있는 곳이 어디이며, 왜 그곳인건지,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무엇이며, 투영된 것은 없는지, 궁극적으로 사적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집안에 머물러 있는 30대 초반의 여인. 축 늘어진 몸뚱이를 이끌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대상들의 제스쳐는 지친기색이 역력하며, 생의 의지마저 상실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 피사체들은 여기 이대로 좌절하고픈 심리만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혹은 바라보게 될 모든 시선의 방향을 외면한다. 여기서 아이러니함이 발생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등져버림은 오히려 그들을 ‘공간 안’이 아닌 ‘공간 밖’, 즉 ‘세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들이 자신의 사적장소, 아픔의 동굴을 누군가에게 열어주고, 곪아버린 상처를 들추는 작업을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외부로의 통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을 더 이상 어둠속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작가의 욕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창문과 빛은 다시 한 번 붙들고 싶은 그네들의 미래와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드리운다. 과거가 현재를 넘어 미래로 이행하는 순간, 개인의 은둔처는 다시 한 번 발돋움 하는 그런 자생력이 가득한 곳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전문>
공간을 묻다: 사적공간의 전향

공간에 대한 사유는 캔버스 위 하나의 점에서부터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흰 캔버스는 2차원적 평면이지만, 점 하나가 그려질 때 하나의 공간이 된다. 점의 위치와 크기, 형태에 따라 캔버스 공간은 긴장, 불안감, 주목성, 소외 등등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단순히 점 하나의 효과만이라 할 수는 없다. 캔버스의 규격과 모양, 놓인 위치와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즉 공간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텅 빔’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공간 안의 존재와 그 주위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고찰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특정 공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묻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위는 공간을 분리하고 명명하며 파편화된 공간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집결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칭해진 공간은 다시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고 이 순환은 반복된다.

공간 다루기는 장소성을 질문하는 것과는 다르다. 장소는 기능과 역할에 따라 물리적으로 분절된 영역들이다. 그러나 공간을 논하는 것에 있어 이 공간과 저 공간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인식론적 구분에 가깝다. ‘장소’가 고정된 단위라면, ‘공간’은 사실 운동하는 연속체와 같다. 끊임없이 시간이 개입하고, 여기서 저기로 무한히 나아가며, 또다른 층위로 오가는 파장을 지닌다. 따라서 ‘사적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서의 ‘선 긋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간을 향한 시선에서, 공간을 다루는 마음에서 밖과 안을 드나든다. 이러한 드나듦은 오히려 ‘공적’과 ‘사적’의 경계를 와해한다. 공공 영역을 사적공간으로 차지하기도 하고, 사적 영역을 공공장소로 이동하여 사적공간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는 물리적 폐쇄성을 추구하고 감추기 욕망으로 뻗어가는 ‘사적장소’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적공간은 오히려 ‘열린 공간’이기도 하며,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능동적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 4명의 작가는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사적공간⟫展 은 작가들의 ‘공간 탐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내딛고 있는 곳이 어디이며, 왜 그곳인건지,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무엇이며, 투영된 것은 없는지, 궁극적으로 사적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목탄을 긋고, 손으로 문지르는 반복 속에서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공간들이 형체를 드러낸다. 서윤아 작가는 눈으로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피부 표면을 스치며 우리의 오감을 전율케 하는 그런 기운과 아우라를 쫓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더듬어간 공간은 긴장감과 생경함이 맴도는 순간들로 구성되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장소에서 마주한 대상들은 관객을 초조함과 불안감까지 내몰아 간다. 이와는 달리 2015년 근작에서 지각되는 그녀의 공간은 내적으로 깊어진 듯하다. 최근 ‘태도’에 대해 고민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외부 세계를 관찰하며 예민하게 반응하던 이전의 시선은 그 방향을 전환하여 차분히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사적공간’의 가장 일차적인 의미는 서윤아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사색의 공간’이다. 무언가를 욕망하고, 관찰하고, 실현하고자 계획하고, 한편으로는 자의식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지는 공간 말이다. 아마도 이런 사색이 가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장소는 박희자 작가가 담아내는 ‘개인의 은둔처’, ‘자신만의 방’일 것이다.

집안에 머물러 있는 30대 초반의 여인. 축 늘어진 몸뚱이를 이끌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대상들의 제스쳐는 지친기색이 역력하며, 생의 의지마저 상실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 피사체들은 여기 이대로 좌절하고픈 심리만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혹은 바라보게 될 모든 시선의 방향을 외면한다. 여기서 아이러니함이 발생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등져버림은 오히려 그들을 ‘공간 안’이 아닌 ‘공간 밖’, 즉 ‘세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들이 자신의 사적장소, 아픔의 동굴을 누군가에게 열어주고, 곪아버린 상처를 들추는 작업을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외부로의 통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을 더 이상 어둠속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작가의 욕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창문과 빛은 다시 한 번 붙들고 싶은 그네들의 미래와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드리운다. 과거가 현재를 넘어 미래로 이행하는 순간, 개인의 은둔처는 다시 한 번 발돋움 하는 그런 자생력이 가득한 곳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개방된 공공영역에서 사적공간의 향유는 가능할까? 손현선 작가의 작업은 일상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대상들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열린 장소에서 한 귀퉁이를 점유하고, 대상을 포착하고, 변화의 템포를 읽다가, 리듬을 음미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그녀의 모든 주의는 대상의 연속된 운동에 집중되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은 뒤로 물러서며 투명한 막이 그녀만의 공간을 생성한다. 차단된 상황 속에서 이제 그녀의 변주가 시작된다. 손현선은 사물이나 누군가의 지속된 반복 그 자체를 지각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 대상을 대하는 심리와 태도는 관찰부분(캔버스에 관찰대상의 전체를 그리지 않는다), 운동의 시작과 끝, 속도 등을 결정하고 이는 붓질의 속도와 형태로 형상화 된다. 따라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포획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작가의 존재와 심리를 부각하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손현선의 사적공간은 그 어디도 될 수 있으며, 선택은 그 장소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한다. 누구도 생성할 수 있는 이 유형의 공간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세계를 드러낸다. 변화를 관조하는 과정에서 우린 세상과 맞물려 운동하고 있는 자신의 호흡을 다시 한 번 인지 할 수 있다.

상상성과 실용성의 경계에 관심을 두는 최병석 작가는 사적공간을 갤러리까지 확장한다. 그리고 상상적 결과물을 실체화 한다. 그는 기억의 장소를 현재로 소환하는 작업을 모색해 왔다. <덫>을 포함하여, 작가의 과거와 현재의 호기심으로 범벅된 아이디어 도구들은 개인 실험실에서 갤러리로 이동하면서 실체가 된다. 관객에게 존재자체가 공유되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이동하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진 몇 개의 오브제들이 아니다. 기이한 사물들의 등장을 둘러싼, 작가의 경험, 기억, 제작과정, 이 모든 것이 옮겨간다. 작가가 진정 공감 받고 싶은 것은 자신이 그러한 도구들을 제작하게 된 ‘계기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작에서, 특정한 행동을 흉내 내는 기계들 역시 이러한 맥락을 이어간다. 다른 측면이 있다면 오브제의 사라진 기능성을, 관객의 주체적 상상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어딘가의 시공간 속에서 채집해 온 일상 사물들의 파편은 관객에게 어떠한 경험을 상기하게 하고, 고유의 기억을 갤러리 안으로 끌어온다. 그 순간 이 구축된 오브제는 작가의 기억과 관객의 기억이 소통하는 매개체가 되며, 갤러리 공간은 창조적 상상들이 부유하는 놀이 공간이 된다.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사적공간’이 어떤 힘을 발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무언가를 다시 확인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 세우고, 때론 누군가와 교섭하길 바라는 그곳. 그곳에서 우린 이해하고, 이해되기를 갈망한다. 사적공간이란 세상으로 향하며, 열려 있고, 개인의 능동적 의지로 또 한 번 변모를 도약하는 그런 쉼터이자 놀이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