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얼음 그리고 존재의 시간

강지현(누루미술관장)

“바람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아유 답답하다. 바람은 우리 눈에 안 보여. 
비, 눈, 서리는 보이지. 그러나 바람은 안 보인단 말이야.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만 보여. 
굴러가는 낙엽, 흔들리는 나뭇가지, 바람이 짚고 다니는 손자국 발자국만 보인단 말야.”

한국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정채봉 작가의 대표작 『오세암』에서 주인공 길손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누나에게 바람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정채봉 작가는 문학인의 사명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려 애쓰는 사람이 여기 또 있다. 박희자 작가다.

못 보는 것을 보게 하는 것
1999년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The Invisible Gorilla)’라는 실험을 했다. 이들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흰옷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서로 패스하는 1분짜리 영상을 보여주며 흰옷 팀의 패스 횟수를 세게 했다. 영상에는 고릴라 분장을 한 여학생이 9초간 화면의 중앙에 등장하여 가슴을 두드리며 카메라를 향한다. 놀랍게도 이 영상을 본 참가자의 절반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은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선택적 인지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증명했다. 
박희자 작가는 이러한 인간의 선택적 인지에 노크한다. 제주 바다의 물과 아이슬란드의 빙하, 풀무원 돌얼음을 포착하고 이를 병치하여 제시한다. <바다와 빙하 그 사이 돌얼음>의 나란히 놓인 세 이미지는 결, 움직임, 시간, 공간이 다름에도 우리는 직관과 감각을 통해 셋 모두 본질은 같은 것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 속에서 물성, 시간, 공간은 삭제된다. 이는 지금에 더 집중케 하는 진동을 만들어낸다. 사회 문화적 구조 속에서 일상의 환경과 매체가 입히고 씌워서 찍어낸 일상 속의 선택적 인지를 전복시키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우리 집 냉동실에 있구나. 내가 먹던 풀무원 얼음이 바로 제주 바닷물이고, 아이슬란드의 빙하구나."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고 흘러 제주에 도착하여 풀무원 얼음으로 내 입속에 들어올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한다. 작가는 보이지 않던 고릴라를 보게 했다.

보는 것과 아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단절된 시간의 덩어리가 아니라 흐름 속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간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결국, 시간>을 컴컴한 벽에 붙여두었다. 심해의 색 변화와 그 위에 떠 있는 오브제, 형태, 색으로 시간과 시간을 연결한다. 
<행성오름>, <땅주름>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있다. 놀러 가서 반짝이는 햇살을 마주하고 그 앞에 서서 활짝 웃는 얼굴로 손하트를 날리며 인증샷을 남길 때는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보인다. 시간의 축적이 보인다. 흑과 백의 대비만으로 구성된 이미지는 더욱 큰 잔상을 남긴다. 그렇다. 시간은 쌓여왔고 쌓이고 있고 쌓여간다. 그 속 어딘가에 나도 있다. 누군가의 시간이 쌓여 그 위에 내가 서 있고, 나의 시간 위에 누군가가 또 서 있다. 내가 휘청하면 내 시간 위에 설 그/그녀의 삶이 휘청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타인의 시간과 시간 사이에 서 있는 나의 지금이 갑자기 편치만은 않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하더라고 이는 보이거나, 보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셋 중 하나다. 별생각 없이 살다 보면 우리는 컴컴한 벽을 지나 생의 끝에 다다른다. 세상의 주도 세력이 만들어놓은 ‘시간은 볼 수 없지만 흐른다’라는 인식의 창과 사고의 틀 속에서 나의 시간만 보다 가는 것이다. 하지만 손전등을 들고 생의 이곳저곳을 비춰가며 애쓰다 보면, 어쩌면 나의 시간과 연결된 너의 시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슬란드의 너와 제주의 내 시간이 맞닿아 있고, 너의 시간 위에 나의 시간이 쌓이고 그 위에 쌓이게 될 누군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돌과 얼음 그리고 존재의 시간’으로 작가는 내 발 수직 아래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내 시간 이전과 이후의 누군가와 내가 유기적 관계임을 알게 해버렸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결국 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리치웨거(David Liittschwager)는 생태환경에 대한 촬영을 통해 알게 된 것을 “A World in One Cubic Foot”라는 책 발간이라는 행동으로 전이시켰다. 그는 각자 발아래 생태를 알기만 해도 전 지구의 생태를 이해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국립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은 이 책을 벤치마킹하여 유소년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성인 발 크기인 12인치(30센티미터)의 육면체 프레임을 만들어서 자연에 설치한다. 참가자들은 매회차 해당 육면체 프레임 안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생태의 다양성과 생물종 간의 유기성을 알게 된다.
작가의 앎이 부른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만들어낸 파장과 파동은 어디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박희자 작가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작가가 세상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작업의 결이 유사할수록 작품이 주는 울림은 크고 깊기 때문이다.
혹자는 박희자 작가의 작업 방식 또는 공간, 메시지가 제각각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맞다. 박희자 작가는 사진을 주로 활용하여 말을 건네지만 디지털 사진을 찍다, 사진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다, 사진 이미지가 소비된 포스터로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어디 이뿐만인가. AI에게 요청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 판화 작업도 한다. 급기야 올해는 사진의 기원으로 돌아가 시아노타입 방식으로 종일 작업을 한다. 아니, 일 년 내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수많은 연습과 실험, 도전과 승패를 관통하는 불변의 한 가지가 있다. 누구나 박희자 작가와 반나절만 지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박희자라는 사람의 인간됨이다. 그 인간됨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 사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정(情)에 기인한다. 정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마음이 있다는 것은 쉬이 놓아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에 밀려 잊힐까봐, 주변부에서 눈에 띄지 않을까봐, 쓸모를 다해 버려질까봐 작가는 늘 잊히고 밀려나고 버려진 것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시선은 작가의 삶과 작업을 일치시키며 기존의 작업 방식과 공간, 메시지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경험한 자극을 새로운 감각의 형태로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이를 구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은 입력된 감각에 따라 제각각으로 출력되는 것이다. 
삶이 어디 예측한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박희자 작가의 작업이야말로 삶의 구현이자 재현이 아닐까 싶다. 현상을 상징으로 구현하는 것을 예술이라 한다면 작가는 분명 틀림없는 예술가다. 삶이 작업인지 작업이 삶인지 모를 작가의 연속된 시간을 응원한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작가의 삶과 시선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길,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감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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